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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아버지의 골프 사랑
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아버지의 골프 사랑
  • 서울경제 골프매거진
  • 승인 2019.04.09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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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또 가문의 비법을 전수하고 있다.

[서울경제 골프매거진] 나는 실력이 평범하다는 이유로 어떤 일에 도전을 주저하는 성격이 아니다. 이를테면 골프도 그렇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아직 겨울이지만 페어웨이의 눈이 얼른 녹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건 조금 희한한 노릇인데, 나는 골프보다는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는 스포츠를 더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이 게임을, 마침내, 사랑하게 됐다.

이건 가족 내력이다.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시카고의 한겨울에도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골프볼을 빨갛게 칠했다. 사촌 1명은 1950년대에 LPGA 프로로 활동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어렸을 때 시카고 외곽의 중소도시에 있는 한 컨트리클럽에서 캐디를 하면서 플레이를 배웠다. 아버지는 꽤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주니어 시절에 일리노이주 고등학교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했기 때문이다. 유수한 대학에서 장학금을 제안하며 프로 선수의 꿈에 불을 지폈지만 모두 거절하고 동부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한 후에는 25년 넘게 플레이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뉴욕에 살았고, 직장 생활을 하느라 골프를 즐길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가 50세가 조금 안 됐을 때 사업상 알고 지내던 한 친구가 에든버러 외곽에 있는 자신의 클럽에 아버지를 초대했다. 아버지는 첫 홀에서 8타를 쳤다. 하지만 9번홀에서 버디를 기록했다. 그리고는 완전히 빠져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 골프 여행을 다녔다.

나는 골프를 대학교 때 교양과목으로 들었는데, 다른 이유가 아니라 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골프 팀 감독에게서 안정적인 골프 스윙의 기본을 어느 정도 배웠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다 배우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연습장에서 슬라이스가 너무 심하게 나는 바람에 옆에 있는 헛간을 맞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때부터 옆에 있는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자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가 됐다.

하루는 아버지와 맨해튼의 첼시 파이어스에 있는 연습장에 갔다. 아버지는 첫 번째 샷부터 저 멀리 있는 네트를 호쾌하게 맞혀서 옆 타석에 있던 훨씬 젊은 사람이 탄사를 보냈을 정도였다. 그 후로 우리는 정기적으로 그 연습장을 찾았고, 나도 어쩌다 드물게 힘이 들어가지 않은 듯한 스윙으로 깔끔하게 맞은 볼의 쾌감을 알게 됐다. 그럴 때면 마치 아무것도 맞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 번씩 실제 코스에서 라운드를 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의 기분은 훨씬 위협적이었다. 나는 골프를 하지 않는 형제들에게 반 농담으로 “1명을 팀에 영입하겠다고 말하곤 했다.

우리 아버지도 그랬다. 가끔 내가 샷을 숲이나 호수, 또는 관목 사이로 날려 보내면 아버지는 눈에 띄게 기겁하곤 했다. 나도 드라이버샷을 페어웨이에 안착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게 엉뚱한 페어웨이라는 게 문제였다. 나는 뮤어필드와 스코틀랜드의 로열도노크, 시카고 골프클럽, 그리고 쇼니--델라웨어 같은 유서 깊은 코스들을 모독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놀라울 정도로 인내심이 강한 선생님이었다. 원래도 뒷마당에서 미식축구 공을 던져주고 다 놀아준 것처럼 구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열 살이 되기 전에 갈라섰다. 그런데 이제 골프코스에서 아버지는 다정한 아빠이자 코치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팔에서 힘을 빼. 팔을 로프라고 생각해라. 볼을 맞히려고 하지 마.” 아버지는 이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

나는 학습 속도가 느렸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팔을 로프처럼. 볼을 맞히려고 하지 말자. 그걸 머리에 새기고 힘이 들어가지 않은 완벽한 샷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뭔가 특별한 것을 목격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아버지는 이 어려운 게임을 높은 수준에서 플레이했고, 천천히 그 실력을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이른바 올드스쿨, 이를테면 스코틀랜드 스타일의 골퍼여서 이 게임의 역사와 전통을 사랑했다. 우리 아버지는 카트를 타느니 우드척다람쥐에게 물리는 편을 택할 것이다. 나는 그런 점을 존경했다.

서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실력이 늘었다. 아버지는 내게 <왕국의 골프(Golf in the Kingdom)>라는 책을 선물했고, 나는 마냥 좋았다. 두어 해 전에 요가를 시작했더니 호흡도 좋아졌을 뿐더러, 발을 땅에 붙이고 균형을 잡기가 더 수월해졌다. 그러다가 뭔가가 맞아떨어졌다. 갑자기 볼이 예전보다 곧게(곧은 듯하게) 날아갔다. 스코틀랜드에서 만난 어느 늙은 캐디의 충고에 따라 나는 웬만하면 스코어를 기록하지 않는다. 좋은 샷은 즐기고 나쁜 샷은 잊어버리는 쪽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예전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다.

작년에는 아버지의 클럽에서 함께 몇 홀을 플레이했다. 아버지는 다시 시카고로 이사를 했는데, 대학 시절에 절친했던 친구와 다시 연락이 닿으면서 골프에 대한 애정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결정에 한 몫을 했다. 그 분은 얼마 전에 심각한 퇴행성 신경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리고 몇 달 후에 아버지는 친구의 유해를 조금 가져다가 친구가 가장 좋아했던 그린에 몰래 뿌렸다. 다음 홀에서 아버지의 티샷은 홀로 그대로 굴러들어갔다.

나도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이제 조금씩 감을 찾아가고 있다. “골프에서 가장 달콤한 걸음은,” 아버지는 내 볼이 멈춘 페어웨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상대방의 드라이버샷을 지나쳐갈 때지.” 몇 홀 후에 우리는 위협적인 절벽에 그린이 조성된 까다로운 파3 홀에 도착했다. 나는 스윙을 했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아주 좋은 느낌이었다. 볼은 높이 솟아올랐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볼이 그린 가장자리에서 한 번 튀어 올라 깃대 60cm 앞까지 굴러가는 걸 지켜봤다. 완벽에 가까운 샷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BY BILL GIFFORD: 빌 기퍼드는 뉴욕 타임스 베스트 셀러 순위에 오른 <스프링 치킨(Spring Chicken)>의 저자이고, 유타주 파크시티에 살고 있다.

 

서울경제 골프매거진 webmaster@golfk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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